Lies of Lies: On Photography

2015 Lies of Lies Catalog


일상의 부스러기를 포착하는 어떤 시스템


글. 이기원


길을 가다 흔히 마주하는 광고판과 현수막, 장을 보러 갔다가 마주하는 상품 진열대, 별 생각 없이 훑어보는 잡지. 이 같은 상황은 일반적으로 ‘일상’이라 지칭하는 범주에 놓인다. 그리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일상의 풍경들을 ‘작고 대수롭지 않은’것으로 치부한다. 이는 ‘소소한 일상’이란 표현이 하나의 관용어구처럼 쓰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일상은 언제나 ‘소소하기만’ 한 것일까? 결혼식장에서 일하는 누군가에게 주말마다 반복되는 결혼식은 그저 따분한 일상이며 고된 노동의 시간으로 작용하지만, 결혼식을 올리는 그 순간의 신랑, 신부에게는 일생 일대의 사건으로 기억되는 것처럼, 일상은 하나의 얼굴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일상의 순간들이 쌓이다 보면 누군가의 인생이 되고 나아가 사회를 구성하며, 후에는 그것을 통해 역사가 쓰여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의 일상은 결코 ‘소소한 것’으로 치부될 수 없는 것이다.

문형민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일상이 사회와 역사를 구성하는 지점’ 즉, 그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일상의 흐름에서 엇나간 어떤 파편을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물론 이는 어쩌면 그저 철없는 호기심일 수도 있고, 무의미한 공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의미하고 쓸모 없어 보이는 일을 벌이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예술이 해낼 수 있는 가장 독자적인 기능이라는 점과 이를 뒷받침하는 아도르노(Theodor Adorno)의 말-“예술작품은 무의식적 역사서술”-을 고려하면 문형민이 관심을 갖는 ‘일상의 부스러기’들은 어쩌면 가장 예술적인 소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부스러기 그 자체를 시각화하는 것이 아닌, 그것이 작품 속에서 스스로 작동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작업을 설계한다. 이는 머릿속 이미지를 시각화한다기 보다는 이미지화 되지 않은 개념 자체를 시각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측면에서 사진찍기의 과정, 즉 카메라의 작동방식과 닮았다. 작가는 ‘사진’이라는 시각화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데 관심을 두기 보다는 ‘카메라’와 같은 장치(프로그램)를 통해 개념을 시각화하는 방식 자체를 창작한다. 작가 스스로가 카메라의 역할로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품의 표면에 드러나는 각각의 요소는 우연적이고 의도치 않은 것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매우 치밀하게 계획되고, 계산된 결과물로서 존재한다. 예컨대 카메라가 찍어내는 사진 안에는 우연성이 개입할 수 있지만,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을 때, ‘사진이 찍힌다’는 과정 자체는 (기계적 결함이 아닌 경우에야)외부 요소가 개입할 수 없는 정밀한 시스템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문형민은 어떤 매체를 다루는 작가인가?”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매체(장르)를 넘나든다고 답하기 보다는 자신의 의도를 가장 명확하게 시각화 할 수 있는 ‘규칙(프로그램)’ 그 자체가 그가 일관되게 다뤄온 매체라고 답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사용되는 회화, 사진, 조각, 영상 등의 매체는 철저히 작가의 필요에 의해 선택된 도구이자, 작품의 물리적 형태를 규정짓는 요소로만 작용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초기부터 이어온 <9 Objects>(2000- )시리즈는 작가가 자신의 지인들에게 각자의 가장 소중한 9개의 물건과 가장 좋아하는 색을 선택해달라고 부탁하고 이를 사진으로 건조하게 규격화하여 각각의 물건에 따라붙는 의미와 맥락을 떼어낸다. 이는 물건의 주인에겐 ‘가장 소중한 물건’으로서 각각의 의미와 그 사이의 관계가 존재하지만 관객에게는 그저 무작위로 배열된 시각적 오브제에 불과한 것으로 다가온다. 결국 <9 Objects> 시리즈의 표면에서 관객이 읽어 낼 수 있는 건 그저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기능 그 자체만을 수행하는 어떤 사진이다. 9개의 물건에 담긴 사연과 관계는 당사자가 아무리 설명을 상세히 하더라도 분명 소통의 한계에 부딪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술작품이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관객과의 소통은 가능한가’라는 작가의 문제제기는 <행동의 순수성 : 45KG>(2008)과 <Highway Star>(2008)을 비롯한 일련의 시리즈에서 좀 더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행동의 순수성 : 45KG>는 분명 작가가 직접 메모한 글귀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작 본인도 해석해내지 못하게 된 것으로, 이를 바라보는 관객은 물론이고 작가 자신조차 그 의미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요소로 자리한다. 이에 작품은 가장 눈을 피로하게 하는 두 색상으로 칠해지고 이를 더욱 강조하는 마감처리를 통해 관객이 그저 작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것조차 어렵게 한다. <행동의 순수성 : 45KG>은 이처럼 ‘작가도 알 수 없는 작업’인 동시에 어떤 작품의 출발점(아이디어)인 메모가 그 자체로 마침표(작품)가 되어버린 경우다. <Highway Star>는 팝송을 모국어가 한국어인 사람에게 들려주고 이를 귀에 들리는 대로 한글로 적게 한 뒤, 다시 이를 영어권 사람에게 영어로 받아 적게 한 결과물을 회화로 마무리한 작업이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크고 작게 변형된 결과를 통해 그나마 가장 명확한 의사소통 수단이라 통용되는 말과 글 역시 완벽할 순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작업들은 근본적으로 (특히 현대미술에서)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과도한 의미를 구겨 넣는 현상과, 이를 어떻게든 해석하고 규정지어 작가와의 소통이 가능할 수 있다는 관객의 믿음 역시 착각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인식과 소통의 문제는 <Unknown Project>(2000-)에서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이 시리즈의 두 갈래 중 하나인 <Unknown City>에서 작가는 일상의 공간을 찍은 사진에서 모든 텍스트를 비워내고 이를 정교하게 원래 없었던 것처럼 그려 넣는다. 이는 사진 속 공간이 익숙한 곳인지, 낯선 곳인지에 대한 판단 자체를 유보시키는 미지의 공간으로 작용한다. 이는 텍스트의 부재가 갖는 의미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작가의 본래 의도와 조금 다르게도) 인식의 기준이 문자에서 이미지로 옮겨온 현대인의 모습이 비춰진다. 글자가 모두 사라진 낯선 풍경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익숙한 몇몇 이미지나 색상을 통해 본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인식해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 작품은 앞선 언급했듯, 일상의 부분이 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떤 현상을 시각화하기 위한 ‘장치’를 자신의 매체로 삼는 문형민의 특성은 <by numbers series>(2008-)에서 가장 명쾌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Art in America’, ‘Vogue’, ‘Time’ 등의 잡지를 1년 단위로 스캔하고 이를 문자와 색상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그리고 이중 가장 많이 사용된 열 개의 단어와 열 개의 색상을 골라내고 조합하여 이를 시각화한다. 물론 이 작품은 표면만 놓고 보면 이는 10,000개의 색칠된 칸이라는 (무척 수고롭겠지만)누구나 그릴 수 있는 모습을 띠고 있다. 하지만 각각의 칸의 색상과 배열이 그저 아무렇게나 이루어진 것이 아닌, 철저한 분석에 의해 규칙(프로그래밍)화되어 도출된 ‘통계’라는 점에서 작가로서 문형민이 어떤 태도와 강점을 가지고 있는지 드러난다. 작가는 잡지를 한 장씩 스캔하는 일에서부터 스캔한 데이터를 분석하는 프로그램을 짜고, 규칙에 따라 캔버스에 색을 칠하는 마무리 과정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과정을 직접 수행하진 않지만 작품이 완성될 수 있게 하는 세세한 규칙, 즉 ‘매뉴얼’을 통해 작품의 모든 과정에 개입한다. 즉 작품 제작을 위한 매뉴얼이 자신의 매체인 것이며 작가는 ‘통계’라는 피사체를 촬영하여 이미지(작품)를 만들어내는 ‘카메라’로 작동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예술가(화가, 조각가, 사진가)라기 보다는 건축가나 영화감독과 같은 ‘아트 디렉터’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매체를 도구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이미 현대미술에서 두드러지는 하나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바 있기에. 문형민은 김홍석, 박찬경, 이완 등의 작가들과 함께 유사한 범주로 묶일 수 있지만, 그는 공간 활용과 작품 자체의 조형적 완성도에서 차별화를 꾀하며 작품의 맥락(의미)를 한가지로 제한하지 않고 복합적으로 가져간다는 점에서 이들 작가들과 구분될 수 있다. 가령 <Unknown City>의 도시 풍경은 실제 사진이 찍힌 장소에 서서 풍경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비율로 제작하여 낯선 느낌을 강조하고, <Unknown Story>는 작품이 걸리는 높이를 달리하며 그것에 쓰여진 텍스트를 읽어낼 수 없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도를 극대화한다. 이에 더불어 최대한으로 끌어올려진 작품의 조형성은 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관객의 시선을 잡아두고 흥미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정리하면, 문형민에게 ‘작품’의 범위는 그의 창작물로서의 오브제(캔버스, 사진액자, 좌대에 앉힌 조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작품이 놓이는 전시 공간과 작품이 관객에게 작동하는 방식까지 포괄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문형민의 작품들을 전반적으로 살펴봤을 때, 이들은 얼핏 일관성 없어 보이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한 장의 사진’이 작동하는 방식과 무척 닮아있다. 각각의 작품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지를 배제하면, 이는 그저 작가가 발견한 ‘일상의 부스러기’를 재현할 뿐 그 자체로 어떤 말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봐야 할까?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비롯한 배경 정보를 모두 알아낸다고 해서 작품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이 글을 꼼꼼하게 읽어왔다면, 위의 물음에 대한 해답은 이미 나와 있다는 걸 알아챌 것이다. 문형민은 몇몇 작품들(<Highway star>, <행동의 순수성 : 45KG>등)을 통해 작가와 관객과의 소통이 어떤 방식으로든 온전하게 이루어 질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결국 ‘작가 문형민’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관객의 몫으로 돌아간다. 각자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지만, 배경 정보를 전혀 모른다고 해서 그의 작품을 감상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역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작품을 100% 이해했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마치 어떤 사진은 그 의미를 전혀 모르더라도 그 자체로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처럼, 문형민의 작업들은 맥락을 알고 봐도 재미있지만, 작품 그 자체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문형민이 자신만의 시각과 방식으로 ‘일상의 부스러기’들을 찾아내고 이를 작품화하는 것을 좀 더 끈기 있게 지켜봐야 한다. 그가 채집한 부스러기들이 모여 어떤 모양을 만들어낼지, 다음 부스러기는 무엇인지도 여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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