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mb project: vol. 01: solo exhibition 월간미술 Review

말과 말 사이에 놓인 ‘dumb’
<문형민: dumb project: vol. 01>전 서미앤투스

글: 이대범 (미술평론가)


주변인물이 소중히 여기는 사물을 무채색 바탕에서 촬영하고 규격화된 그리드에 정렬한 <9 Objects>(2002)는 그 사물에 내재된 소장자의 취향을 지운다.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찍은 <Unknown City>(2004)는 도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모든 문자를 지움으로 도시를 익명의 공간으로 만든다. <Lost in Supermarket>(2005)는 엽기적인 광고 혹은 대형 사건 기사가 실린 신문 기사를 지울 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흔적도 화려한 색상의 모노톤으로 뒤덮는다. 이렇듯 문형민은 그간의 작업에서 대상의 발화를 ‘지움’으로 미학적 정당성을 구축했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문형민은 그 빈자리를 자신의 목소리로 채우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묵묵히 대상을 지운다. 다른 대상도 지운다. 또 다른 대상도 지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의 목소리도 지워버렸다. 이제 자신의 목소리를 내보려 하지만, 그는 이미 벙어리(dumb)가 되었다.


dumb
a. 벙어리의, 말을 하지 못하는(않는), 말로는 나타 낼 수 없는 
v. 침묵시키다, 침묵하다,
n. 바보, 어처구니없는 실수, 멍청이.


말과 말 사이에는 선험적으로 의사소통의 부재가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이 부재의 순간을 무시하거나 의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명확하게 인지한다고 여기는 말과 말을 통해 완벽한(?) 의사소통을 한다. 그렇지만 완벽한 의사소통이란 애초에 불가능 한 것이며, 단지 유사(類似)한 체계에 대해 스스로 위안을 삼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불가능한 세계’를 ‘가능의 세계’로 보이게 하는 허위를 인식하는 것, 그리고 나아가 그것을 반성적으로 재고하는 것은 중요하다. 문형민의 <dumb project: vol. 01>는 그간 가려져 있어서 인지하지 못했던 말과 말의 사이 공간을 재고(再考)한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이전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텍스트를 지우거나, 텍스트를 숨기거나, 텍스트를 다른 매체로 대체하거나, 텍스트에서 다른 텍스트로 전환시킨다. 즉, 문형민은 말과 말 사이의 새로운 언어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우리가 사용했던)말과 말을 숨기거나 전환시켜 그 사이 공간을 지시하게 한다.

 

정제된 화면에 내재된 허구성

전시장 초입부터 상징적인 아이콘이 말끔하게 정제된 모습으로 놓여 있다(<love me two times>). 높은 좌대 위에 놓여 있기에 관객은 그것을 우러러 볼 수밖에 없는, 그리고 강렬한 빛을 한 몸에 받아 더욱 찬란하게 보이는 미키마우스는 이미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마저도 정형화된 캐릭터이다. 그러기에 미키마우스는 형태뿐만 아니라 의미마저도 확고부동한 캐릭터이지만, 문형민은 이를 해체한다. 시간의 변화에 상관없이 굳건해 보였던 미키마우스의 표면에 그 무언가가 흘러내리면서 그것의 정형성은 해체된다. 문형민이 설탕과 밀랍으로 제작한 미키마우스는 본래 단단한 구조를 가질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미키마우스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해 그에게 가해진 빛과 누군가가 봐 주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오히려 그의 죽음을 촉진시킨다. 그가 죽음에 다다를수록 달콤한 향기는 더욱 진하게 전시장을 가득 채우지만, 형태는 흉물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에도 미키마우스는 여전히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유유히 사방을 둘러보고 있다. 그렇다면 죽음(해체)에 다다를 수밖에 없는 존재의 상징성은 단순한 차원(미국 자본주의 문화)을 넘어서 이번 전시 자체를 규정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바로 정제되고, 단단한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 무엇(예술일 수도 있고, 언어 일수도 있는)의 허구성이다.

긴 제목을 통해 작품의 연역을 알 수 있는 <400만원의 제작비를 들어 런던에서의 1회 전시 후 700만원의 운송비를 들여 정식 반입하였으나 보관과 판매의 문제로 파손된 작품으로 만든 개집>은 본래 가지고 있는 ‘작품’이라는 상징성이 ‘개집’으로 대체된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이 ‘개집’이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보관과 판매’의 문제 때문이다. 400만원을 들여 제작하고, 전시도 한 그것이 ‘보관과 판매’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폐기처분 되어야 하는 것이 예술작품의 운명이다. 그러나 ‘작품’이 ‘개집’이 되었다는 사실은 표면적 이야기이다. 여기서 추가적으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개집’ 역시 또 다른 작품으로서 전시장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개집’일까? ‘작품’일까? 작가가 ‘개집’이라고 명명하고 있지만, 실상 그것은 ‘작품’이다. 물론 문형민이 상당한 돈과 시간을 들여 제작한 작품으로 만들었기에 작가 스스로 이러한 행동을 헛짓(dumb)으로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비싼 재료를 가지고 새로운 작품을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정작 헛짓은 그것을 ‘새로운 작품’이 아닌 ‘진짜 개집’으로 보고 있는 관객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관객이 ‘새로운 작품’을 ‘개집’으로 규정하게 된 이유는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긴 제목 때문이다. ‘작품’에 붙는 수사는 그것이 지금까지 지나온 긴 시간과 상당한 돈을 보여준다. 그러나 ‘개집’은 아무런 수사 없이 규정되고 있다. 이러한 제목의 구조는 ‘작품’과 ‘개집’을 대립적인 의미로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기에 관객들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작품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제목이 지시하고 있는(작가가 말하고 있는) 연원에 중심을 둔다.

같은 맥락에서 <행동의 순수성: 45kg>과 <highway star>, <liike hell>과 <by NUMBERS Series: 미술잡지 A: 2001~2008>이 있다. 먼저, 분홍색 형광 바탕에 녹색 형광의 글씨로 ‘행동의 순수성: 45kg’이라고 적은 <행동의 순수성: 45kg>은 화면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텍스트 때문에 작가의 의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작품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화면 가득한 형광색은 시선의 접촉을 방해한다. 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도 이 메모가 어느 날, 왜, 어떻게, 어떤 의미에서 남기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관객은 눈부신 색에 놓여 있는 정체모를 메모를 통해 작가의 창작행위를 이해하려고 할 것이다. <highway star>, <like hell>은 팝송 가사를 한국인이 한글로 옮기고, 그것을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이 다시 영어로 옮기고, 그것을 작가가 다시 캔버스에 옮긴 것이다. 한국인/외국인/작가의 세 지점을 지나면서 하나의 텍스트는 원본 텍스트, 한국인이 만든 텍스트, 외국인이 만든 텍스트, 작가가 만든 텍스트로 분할된다. 이 지점에서 이들은 상호 이해(소통)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결과물은 말과 말 사이에서 생긴 왜곡으로 가득하다. 이것은 단순히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소통의 문제이다. 매월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야하는 잡지를 추적한 <by NUMBERS Series: 미술잡지 A: 2001~2008>는 매년 9월호 미술잡지 기사에서 추출한 10개의 단어에 색상을 지정하여 격자무늬로 평면작업을 한 것이다. 작업의 표면은 화려한 색상으로 치장되어 있지만, 정작 그것은 10개의 색의 조하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이것은 화려해 보이는 미술이라는 것이 몇 개의 상투적인 단어로 규정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할 말이 너무 많은 ‘dumb’

그렇다면 문형민은 이것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가? 그는 ‘dumb’을 규범화된 언어를 통해 정제된 모습으로 보여주면서 표면에서는 숨기고 있으나, 그것은 정제된 화면에 함몰되지 않는다. 정형적인 캐릭터인 미키마우스(그러나 흉물로 변하는), 작품을 연원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 제목(그러나 이 때문에 새로운 작품을 개집으로 보게 하는), 팝송 가사를 옮겨놓은 캔버스(그러나 문법도 맞지 않고, 가사 전달도 되지 않는), 직설적인 화법(그러나 작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화려한 격자무늬(그러나 상투적인 어휘의 집합) 등으로 말이다. 이렇듯 문형민은 <dumb project: vol. 01>에서 끊임없이 그러나 두드러지지 않게 규격화되고 정제된 모습을 의심하며 해체하고 있다. 색맹테스트 그림에 숨겨진 ‘dumb’처럼 말이다. 화면의 색상과 그것들이 만들어 놓은 조형적 형태의 표면에 집중 혹은 근접해서 본다면 보이지 않겠지만, 조금만 떨어져서 말끔하고 안전해 보이는 전체를 조망해 본다면 그곳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는 ‘dumb’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문형민은 이 세상에 놓인 수많은 ‘dumb’를 목격했던 것이고, 이 모습에서 말문이 막혀 버린 것이다. 이것은 그가 벙어리이거나, 바보이거나 말을 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그것을 말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가 제시한 ‘dumb’을 조망하면서 그가 입을 떼서 발언 할 때를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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